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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노리개 장도 고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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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TTEO FOLK MUSEUM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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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생YETTEO FOLK MUSEUM
삼국시대에1,200℃ 이상의 고화도 환원번조의회청흑색토기가만들어졌다.
이러한 전통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자기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8세기경부터 연유계(鉛釉系)의 녹유토기(綠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의 발달로 시유토기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또한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 성당(盛唐)도자기, 오월국의월주청자는고려청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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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월국과의교류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 입증된다. 950~958년 광종은 국사(國師) 원종대사(元宗大師)에게 금구자발(金釦磁鉢)을 하사한다. 이 발은 청자 발에 금테두리를 씌운 상품으로 월주요에서제작한 것을 고려에서 수입한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26에서 “959년 지종(智宗) 등 고려의 승려 36명이 오월국에입국하였다.”는 기록과 「불조통기(佛祖統記)」권10에서 “961년 천태전적(天台典籍)과 체관(諦觀)을 오월국에 보냈다.”라는 내용을 통해 오월국과의 교류를 통한 월주청자의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9세기부터 서남해안 지방은 청자와 청자번조기술이도입·전파되는 공간으로 토기 생활권에서 벗어나 자기 생활권으로 진입한다. 이는 서남해안이 환원번조와 갑발(匣鉢: 번조시재, 티가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마에 넣는 개비)로 청자중심지인 강진, 부안, 개경을 잇는 관요로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햇무리굽청자(日暈紋系靑磁)와 녹청자(綠靑磁)가 이곳을 기점으로 고루 분포한다. 햇무리굽청자는삿갓을 엎어 놓은 모습의 몸체와 넓고 낮은 햇무리모습의 굽다리청자완이다. 양질(良質)의 햇무리굽청자는 점차 대량생산을 하게 됨으로서급속히 청자문화가 퍼져나는데 일조하였으나, 조질(粗質)의 값싼 청자도 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조질의 청자는 일반백성을 대상으로 생산되었으며, 유약이 녹갈색을 띠므로 녹청자라고한다. 태토에모래 등의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는 기공(氣孔)이 치밀하지 못하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10세기는 청자제작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다. 대표적으로 순화3년임진년(淳化三年壬辰年) 태묘제4실 향기(太廟第四室享器) 장왕공탁조(匠王公托造)의 고배(高杯)와 순화4년계사년(淳化四年癸巳年) 태묘제1실 향기(太廟第一室享器) 장최길회조(匠崔吉會造)의 청자항아리가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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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달YETTEO FOLK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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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자기는청자, 백자, 철유(鐵釉), 흑유(黑釉) 등으로 다양하나 주류는 청자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청자의 발달과정으로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고려전기〔태조19(936년)~예종17(1122년)〕 11~12세기에는 청자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백자, 흑유등이 개발된다. 청자의 기면을파내 다른 면과 두드러지게 하는 이형연판문(異形蓮瓣紋), 음각(陰刻), 양각(陽刻), 철화문(鐵畫紋), 퇴화문(堆花紋) 등이 등장한다. 강진요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대되어 대구, 부안 일대에도 청자요가 생기고 관요형태로발전한다. 질과 기형 그리고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재반양식과번조기법이고려화되던 시기이다.

고려중기〔인종1(1123년)~고종17(1230년)〕는 가장 고려적인 아름다움을 표출하던 시기이다. 귀족적인 비색청자(翡色靑磁)가 완성되었고 상감기법과 더불어 문양구성이 전성기에 이르렀다. 12세기 전반에 순청자중 인종왕릉의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은 최고로 평가된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지은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仕高麗圖經)」 권23 [기명(器皿)]에서는 청자를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하며 색택이 더욱 아름답다.”고 기록하였고 북송말기 학자인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에는 “고려청자의 색이 천하제일이다.”라고 할 정도로 비색유약의 완성기였다. 「고려사(高麗史)」 의종11년에는 청기와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기형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획기적인 기법인 상감기법이 등장한다. 청동의 입사(入絲)기법을 청자에 접목시킨 것으로 1159년 문공유의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紋盌)은 맑고 투명한 상감기법의 정점을 보여준다.

주문양은 중앙에 배치하여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적 미를 표현하는 한편 종속문양은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하고 안정감을 주는 상호보완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청자는 사회적 변혁(變革)속에 변화를 겪는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고려청자는 질과 양식이 떨어진다.

후기〔고종18(1231년)~공양왕4(1392년)〕13세기에는 몽고침입으로 기형이 날렵하던 것이 둔해지고 굽도 커지고 비색이 어두워지며 문양도 퇴보해간다. 특히 1269년~1287년 사이 제작된 청자상감은 암녹색의 유약과 둔해진 곡선으로 모래받침에 굽이 나타난다. 14세기 초 청자상감과 순청자가잠시 안정적인 생산을 하였으나 중엽에 다시 질, 기형, 문양이 극도로 퇴보된다. 결국 쇠락한 청자는 조선의 분청사기 모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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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는발전과정전반에걸쳐만들어졌던모든기법과기형, 색을 기준으로 순청자, 상감청자, 회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채청자로나눠진다.

순청자(純靑磁)
청자의 색은 9세기 황갈색, 녹갈색에서 회청색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11~12세기에는 유약과 바탕흙이서로 동화되어 비취색(翡翠色)인 청록색을 띤다. 이 청록색의 순청자는 장식을 하지 않고 양각, 음각, 상형투조(象形透彫) 등의 기법만을 사용한 것을 의미한다.
12세기 청자양각연당초문병(靑磁陽刻蓮唐草紋甁)과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이 순청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반투명하고 균열이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단정하고 뛰어난 균형미를보이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상감기법의 영향으로 퇴조하면서 고려후기에는 유약의 질이 저하된다.

인화기법
상감기법을 단순화 시킨 것으로 도장과 같은 시문도구를 이용하여 기면에 거의 공간을 남기지 않고 문양을 찍은 다음, 음각된 부분에 백토를 분장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한 기법이다. 주문양은 국화문, 연화문, 초문, 호접문이며 종속문양은 초엽문, 당초문, 여의두문, 연판문, 자문이다. 특히 왕실과 관청 그리고 생산지를 압인 혹은 상감기법으로 새겨 제작시기와 생산지의 특색을 비교하는 자료로 쓰인다.

박지기법
기벽에 백토를 분장한 후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음각으로 그리고 문양이외의 배경을 긁어내는 기법으로 백색과 태토의 회색이 대조를 이룬다. 역상감기법으로 긁어낸 부분에 철채를 하여 흑갈색이 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문양은 모란문, 모란당초문, 연판문, 연화당초문, 어문 등으로 생동감 있는 활달한 문양을 표현하여 15~16세기 유행한다.

조화기법
박지기법과 유사한 것으로 백토 분장을 한 후 원하는 문양을 선으로 조각하여 백색 바탕에 회색의 문양이 보이도록 하는 음각기법이다. 이미지화된 회화적인 필치는 모란문, 모란당초문, 연초문, 연당초문, 어문 등 다양한 소재로 선을 처리하여 자유로운 도공의 심정을 나타낸다. 추상적인 기법은 규칙에 구애받지 않은 선의 미학을 표현한다.

귀얄기법
귀얄(풀, 물감을 칠하는데 쓰는 솔)로 현탁액 상태의 백토를 바르는 것으로 대량생산하는 막사기에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여과 없이 전달되는 귀얄의 결 모습은 회흑색 태토와 대조를 이루어 운동감 있는 효과를 낸다.

덤벙기법
굽을 제외한 그릇의 기면 또는 그릇전체를 백토물에 넣었다 꺼내는 기법이다. 백토물이 비교적 두꺼운 편이라서 포용력이 있는 따뜻함과 차분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떠한 기교가 없는 자연적 백토물의 흐름은 추상성과 여백의 미를 담아낸다.

철화기법
우선 귀얄로 분장한 후 흑색이나 흑갈색의 철분안료를 붓에 찍어 문양을 나타낸 것이다. 문양은 주문양만을 반추상화시켜 단순명료하게 표현하고 주변을 생략함으로서 여백의 미를 드러낸다. 대개 15~16세기 충남 공주시 계룡산 일대의 요지가 주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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